하늘 나라 편 지

+ 천국편지 / 경이로움이 있다 & 무한 속에는 편견이 없다

+ 쉬 리 + 2016. 7. 30. 13:20

 

 

 

천국편지 / 경이로움이 있다

 

경이로움이 있다

There Is Wonder

 

Heavenletter #5725. - God  7/28/2016

http://heavenletters.org/there-is-wonder.html

 

   

 

신이 말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너희는 네가 지구상에 잉태되기 전에 존재했다. 내가 이것을 전에 말하지 않았느냐? 네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결코 없었다. 영어에 오래된 격언이 있다. “너는 너의 아버지의 눈에는 단지 하나의 반짝임에 지나지 않았다.” 이 경우에, 우리는 말할 수 있다. “너는 너의 아버지의 눈에 단지 하나의 반짝임에 지나지 않았다.”

 

결코 너는 없었던 적이 없다. 나는 내가 그것을 백 번이나 말했는지에 개의치 않는다. 네가 없었던 때가 결코 없었다. 우리는 항상 무한 속에서 존재했는데, 네가 무한하기 때문이다. 우리들, 너와 나는 이날까지 무한 속에서 존재한다. 따라서 그래, 너의 몸이 일시적이지만, 너는 영원하고, 그리고 너는 무한하고 영원하다. 네가 불사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공정하다. 의식의 면에서 너는 불멸이다.

 

너는 지나간 언젠가, 네가 다소 너 자신을 알았으면 좋겠다는 일종의 느낌을 가졌느냐? 물론, 언젠가와 그때가 없지만, 그러나 너는 순수한 의식의 이런 방식으로 너 자신을 알기를 좋아할 것이다.

 

헝클어뜨림은 없다. 오직 존재하는 것이 있었고, 네가 있었다는 존재, 그리고 네가 있다는 존재가 있다.

 

너는 단지 어떤 이들만이 아니라 모든 이들을 알고 있었다. 존재함은 존재함을 알고 있었다. 존재함은 존재함을 알고 있다. 부재란 것은 결코 없었다. 물론 없는데, 하나됨Oneness이 항상 영원하기 때문이다.

 

그 하나됨으로 네가 항상 존재해왔음이 상상하기 어려운데, 안 그러냐? 너는 우리의 사귐이 다소 지금이라고 느끼느냐? 너는 그것을 느끼느냐? 이 거의 기절한 듯한, 세계를 통해 달리는 일종의 고요한 황홀감을 묘사할 방법이 없다. 묘사될 수 없다. 이해될 수 없다. 오직 느껴질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희미한 느낌이 아니며, 그러나 그것은 명확하지 않다. 그것은 하나됨의 기미와 같지만, 그것은 또한 그것이 아니다. 하나됨/하나임Oneness. 하나의 단순한 하나됨. 너는 그것으로 약에 취한 듯 느낀다. 만약 백만 개의 하나됨이 있었다 해도, 너는 하나됨이 바로 지금 느끼는 이 존재함보다 더 크게 느낄 수 없었다. 무엇인가? 이것이 천국이 될 수 있는가?

 

닫아라. 그것은 닫혔지만, 천국으로 부르는 이 찾을 수 없는 장소를 기억해라, 거기 위치들이 없다. 위치들은 무한 속에 사용가능하지 않은데, 시간의 개념이 무한의 장소-없는 곳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지구상으로 확실히, 시간과 공간이 쉬이 하고 들어온다. 너는 심지어 지도들과 시계들이 없지만, 지도들과 시계들이 단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도들과 시계들이 있다고 우리가 가정하자.

 

다른 한편, 하나됨은 더 이상도, 더 이하도 없는 곳에서조차 확장이다. 너는 바로 지금, 너의 가슴 속에서나 어느 다른 곳에서 확장을 느끼느냐? 있을 수 없다고 너는 생각할 수 있지만, 너는 그와 같은 무언가를 느낀다. 존재함으로서 물론 너는 세상을 초월한다. 너는 초월을 초월한다! 너는 하나됨 속에 존재하며, 그리고 여전히 너는 존재하지 않는데, 비록 네가 항상 궁극적으로 영원히 하나됨일 때에도 말이다.

 

사랑이 어떻게 표현될 수 있느냐? 모든 종류의 말들과 영화 사진들은 아이디어들과 이미지들을 줄 수 있지만, 하나됨 외의 어떤 것도 하나됨과 동등하지 않다. 하나됨이 진실이다. 믿어진 진실보다 못한 것이 있고, 그리고, 여전히, 진실보다 못한 것은 어디든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됨은 가장 맛있는 수프나 스튜의 일부가 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어느 것이람 없다. 아, 그러나, 그래, 경이감이 있다.

 

만약 시간이 없다면, 너는 어떻게 “언제 우리가 만났나요?”를 물을 수가 있는가? 아니,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경이감 속에 한숨 쉬는 것이다.

 

하나됨 속에는, 네가 생각들로 아는 생각들이 없다.

 

사랑이 알려졌다. 사랑은 결코 알게 되어있지 않다. 하나됨 속에서 누가 그 자신으로부터 사랑을 분리할 수 있는가? 그래, 사랑이 있고, 그러나 누가 “아, 에, 이것이 사랑입니다”라고 생각하거나 말할 수 있는가, 마치 사랑이 하나됨으로부터 분리되었다는 듯이, 하나됨 속에 구분할 누구도 없는 곳에서 마치 사랑이 구분할 수나 있다는 듯이 말이다. 하나됨의 기쁨 속에서, 누가 하나됨의 외부로 나가기 위해 에너지를 모을 수 있고, 볼 수 있는가? 아무도 없다.

 

비록 하나됨의 정적을 깨뜨리는 것이 가능하다 해도, 하나됨을 방해하거나 질문으로 대답하는 것은 고사하고, 누가 물을 질문을 생각조차 할 수 있는가? 누가 방해받을 수 있는가? 누가 노력을 만들고 싶어 할 수나 있는가? 오, 행복이여. 오, 하나됨이여. 너의 가슴은 말한다. “오, 신이여, 감사합니다.”

    


 

 

 무한 속에는 편견이 없다 

 

 무한 속에는 편견이 없다

In Infinity, There Is No Bias

 

Heavenletter #5726. - God   7/29/2016

http://heavenletters.org/in-infinity-there-is-no-bias.html

 

신이 말했다.

 

나의 가슴에는 바닥이 없고, 그리고 꼭대기도 없다. 나의 가슴은 무한하다. 진실이 열려질 때, 너의 가슴이 또한 무한하다. 그렇다 해도, 나의 무한한 가슴은 평온하고 참을성이 있는 반면, 너의 무한한 가슴은 조급함 속에서 그 발을 놀리는 경향이 있다.

 

너의 가슴의 방대함을 인식하기 위해 네가 필요한 모든 것이 평온하게 되는 것이 될 수 있다. 비록 네가 그 시간이 아님을 안다 해도, 네가 참을성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는데 세상의 모든 시간을 가지고 있다고 내가 말하겠다. 삶에서의 너의 서두름은 무엇 때문인가? 네가 그러한 조급함 속에 있어야만 하는가? 그리고 무엇 때문에? 너는 조금해짐을 즐기고, 너의 의견들을 마치 그것들이 성스러운 것처럼 주장하는가?

 

네가 좋아하는 식으로 모든 것, 또는 무언가를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라. 네가 누군가의 집을 방문할 때, 네가 그들의 가구들을 배열하는 방식을 좋아하지 않을 때, 나는 네가 일어서서 그들을 가구들을 그들을 위해 재배열하지 않을 것으로 상상한다. 너는 그렇게 하지 않는데, 안 그러냐? 비록 네가 인증된 디자이너라 해도, 너는 집주인이 네가 그렇게 하도록 초대하지 않는 한, 가구들의 어느 것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 앞의 이 문제에서, 우리는 실내 장식의 다른 종류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네가 세상을 보는 방식의 내부 설계, 너의 관점, 너의 의견, 그리고 다른 이들이 다르게 볼 수 있는 방법들에 대해 말이다.

 

누가 네게 반드시 기뻐야만 한다고 말하느냐? 네가 반드시 기뻐야만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한, 왜 너는 조급해지겠는가? 정확히 왜 너는 모든 세상이 네가 좋아하는 식으로, 네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장식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누가 다른 이들을 너에게 책임지게 만들었느냐? 너의 다 자란 아이들도 너에게 책임이 없다.

 

세상의 모든 이들은 그들의 선호들을 가지고 있다. 세상이 너의 개인적 선호들을 존중해서 너에게 구부려야 하느냐? 모든 여관에 방이 있다고 믿게 하기 위해 내가 여기 어디선가 잘못을 만들었느냐?

 

만약 모든 이들이 세상이 그의 의지로 절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세상에 어떤 혼란이 있을 것인가? 여전히 많은 해들 동안, 모든 이들이 단지 그렇게 생각해왔을지도 모른다. 그들이나 네가 실제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 아니다. 네가 결코 생각지 않았지만, 세상이 너에게로 맞출 것이라고 가정하기가 더 쉽다.

 

그것을 생각해봐라, 세상에는 혼란이 존재한다. 혼란이 걷잡을 수 없다. 이들 두 가지 요인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을 수 있느냐? (1) 네가 대부분의 다른 이들보다 더 잘 알고 있다고 말하는 하나의 사고방식, 그리고 (2) 세상에 있는 모든 조급함.

 

우리가 세상의 상태에 대한 기초를 발견했다는 것이 가능한가? 에고 마음이 세상의 모든 전쟁들과 비통함에 대해 책임이 있을 수 있느냐? 너의 의견들이 세상으로 본질적인가? 너의 의견들이 정말로 너에게 본질적인가?

 

이제, 내가 이 모든 것을 말하는 동시에, 나는 또한 너도, 다른 모든 이들도 세상에서 못할 일이 없다고 말하고 싶다.

 

심지어 네가 비극으로 보는 것은 단지 너의 의견에 지나지 않는다. 너의 의견들이 어딘 가로부터 온다. 아마도 네가 살고 있는 바로 그 세계가 너의 삶에 무엇이 어른거릴 지를 네게 가르쳤을지도 모른다.

 

어딘가에서 너는 몸의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을 배웠다. 어디선가 너는 고통의 전체 생각을 배웠다. 너는 무엇이 나쁘고, 무엇이 좋은 지를 배웠다. 너는 당황함과 완전한 수치심의 기술을 배웠다. 수치심은 자만심의 단지 다른 면에 지나지 않는다. 너는 어디선가, 에고 자만심과는 다른, 자존감의 전체 느낌을 집어 들었다. 어딘가에서 너는 무엇이 본질적이고 무엇이 아닌지의 생각을 집어 들었다.

 

어떤 이들에 대해, 너의 의견들이 자주 바뀔 수 있다. 다른 이들에게는 너는 소중한 삶을 위해 너의 의견들을 고수한다.

 

네가 너의 의견들을 최종 결정권으로 고려하지 않는다면 어떻겠는가? 그때 너는 안정되고 참을성이 있을 것이다. 의견들의 차이점들이 공존할 수 있고, 네가 반대하지 않았다면 어떻겠는가? 이것을 한번 시도해봐라.

 

 

번역출처: AH.Korea http://www.abundanthopekorea.net/board2_3/9670 신의 편지/1245